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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상반기 회고: 스페인과 시빅해킹

발행 시간 오전 03:03

요새 문득 점신의 신년운세 중 한 문구를 떠올리는 일이 잦다. “님은 스스로를 자신이 꿈꾸는 인물과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는 ‘능력’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을 드라마틱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장점입니다.” 약간 비문 아닌가 싶기도 하고, 왜 ‘능력’이란 단어에 작은 따옴표까지 붙였는지, 신년운세라면서 왜 5년간 안 바뀌는 것인지 등 여러 의문들이 있지만.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이 시대에, 저렇게나 근거없이도 확언하는 말투로 말할 수 있다니. 그 말투에 묘한 위안을 얻으며 쿠팡 사이트 방문까지 불사하며 종종 점신을 열어보는 나는 뭔지.

신기한 건, 작년 혹은 그보다 더 이전의 내 바람 중 실제로 이룬 게 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하루하루 의도를 갖고 살지 못했다. 물론 매 순간 생각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작년부터 쭉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산 느낌이다. 이번에야말로 글을 정말 꼭 쓰자 마음 먹고 여러 글쓰기 마감 모임을 전전했지만 회고도 2년 만에 쓰는 걸 보면 진짜 정신 없이 살았다 싶다. 그런데도 올해 초 만다라트에 적은 것 중에 이룬 게 몇 개 있어서 놀라울 따름이다. 더 놀라운 건, 올해 안에 72개의 액션플랜을 실행하겠다고 목표를 잡은 6개월 전의 나의 패기이다. 지금 연휴 찬스로 5일째 쉬면서 겨우 글 하나를 쓰기 시작하면서 느낀 건데, 저걸 1년 안에 다 하려면 백수여야 한다.

아무튼 돌아보니 나는 어떤 것을 이뤘냐 하면.

일단 스페인 워홀을 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해졌다. 물론 아직 워홀 비자 신청도 안했고, 살 곳도 안 알아봤고, 언제 갈지 정확한 날짜도 안 정했고, 정해진 게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년엔 스페인에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든다. 올해 초부터 스페인 책방의 해봄단 모임에 나갈 때마다 스페인 워홀을 갈 예정인 노체라고 자기소개하면서 자기세뇌한 덕분이다. 해봄단을 하면서 스페인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페리아 데 아브릴 파티도 해보고 세비야나스와 빠델도 배우고. 가보고 싶었던 카페 알베르게, 이마스와 스페인클럽도 가보고. 혼자 가면 들을 수 없었을 얘기들도 해봄단이라서 더 들을 수 있었고. 스페인어 공부 면에서도 과거형이라는 큰 고비도 넘을 수 있었고 이해하든 못하든 스페인어 원서읽기도 시작했다. 매달 스페인책방 이벤트에 꼬박꼬박 참여하면서 도파민을 충전한 덕분에 노잼 시기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상반기를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워홀 계획을 계속 미룬 덕분에 해봄단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원래는 12월에 스페인으로 떠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9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워홀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 그럼 프리워홀러 다이어리도 꾸준히 써봐야지.

사람들이 나를 어떤 개발자로 기억했으면 좋겠는지 혼자 종종 질문해보곤 했다. 나는 나를 ‘시빅해킹’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소개하고 싶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해보이고, ‘내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뭔가를 열심히 노력 중인가?’ 하면 ‘흠…’ 스럽긴 하다. 그래도 상반기 동안 시빅해킹 커뮤니티에 꾸준히 참여했다. 3월에는 오픈데이터데이에 행사에 참여해 존맛국회의 2022년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 코딩으로 데이터 정제를 할 수 있기는 커녕 엑셀 함수도 다루지 못해 노가다로 처리한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파이썬이나 엑셀 둘 중에 하나는 배워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4월에는 민족 대이벤트 총선을 맞아 콜22 캠페인을 오픈했다.처음엔 백엔드도 기여해보고 싶다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프론트도 기존 코드를 복붙하는 수준으로 기여해 아쉬웠다. 하지만 각종 여성단체의 SNS에 콜22 캠페인 포스트가 올라왔던 순간이 참 감동적이었다. 지금은 빠띠의 ‘데이터로 세상을 바꾸자’ 사업에 참여하며 국회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기획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그래도 실제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가 생긴 것 같아서 열심히 해보고 싶다. 비영리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커뮤니티에도 참여해 여러 인연이 생겼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빅해킹하는 사람들을 선망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시빅해킹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알고 지내게 된 게 문득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직 시빅해커라고 나를 소개하기는 망설여지는데, 좀 더 열심히 해야할 듯 하다.

커리어적으로는 2가지 성취가 있다. 해외 기술 컨퍼런스에 exhibitor로 참여한 것과 FEconf에서 발표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4월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FOSSASIA 행사에 부스 운영자로 참여했다. 첫 글로벌 컨퍼런스 참여였는데 영어를 좀 더 잘했다면 좋았겠지만 대부분이 영어 네이티브가 아닌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손짓 발짓 브로큰 잉글리시로 어떻게든 소통하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아시아의 오픈소스 커뮤니티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흥미로웠는데, 오픈소스 커뮤니티 운영자들의 순수한 열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동기부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위민후코드 서울 운영자로서 참여한 거라 DEI 관련 발표를 갈무리하는 아티클을 작성하려고 했는데, 뭐, 잘 안됐다. 마음 속의 부채감으로만 남은 글감들이 쌓여 있는데 연휴에 시도해보든지… 모르겠다. 아무튼 한국의 오픈소스 커뮤니티 운영자들과 함께 갔던 거였는데 나를 제외하고 다른 분들은 다 발표자였다. 그걸 보면서 나도 기술 컨퍼런스 발표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FEconf 라이트닝 스피커로 지원했는데, 진짜 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운좋게 선정됐다. 근데 문제는 24일에 발표인데 아직 발표 준비를 못했다. 그래도 다음주에는 무사히 FEconf 발표 후기를 쓰고 있길…

일적으로는 좋은 팀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미진했던 것 같아 아쉽다. 사실 문제들이 없진 않은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하지만 지금 당장 해내야 하는 업무만 해도 업무시간을 다 쓴다. 그래도 이번에 코드 리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의한 경험이 좋았다. 업무 시간에 코드 리뷰를 하는 것도 조금 부담스러운 감이 있어서 맡은 태스크를 완료하고 시간이 조금 남았을 때 하거나 조금 야근을 해서 하곤 했다. 일은 늘 많고 업무 시간 중 남는 시간이 별로 없다보니 코드 리뷰가 안 된 채로 배포되는 코드들이 많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코드 리뷰를 하기 위해 PR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해 코드 리뷰를 시작하기가 부담스럽다는 것도 문제라 느꼈다. 데일리 미팅 때 팀원들과 그런 얘기를 나눴는데 백엔드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지 백엔드 팀장님이 개발팀 모두 함께 논의해보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일단 PR 맥락 파악에 드는 리소스를 줄이기 위한 AI를 이용한 PR 요약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코드 리뷰를 업무의 일부로 정착시키고 코드 리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하기 위해 팀원 모두 함께 코드 리뷰를 하는 시간을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해 운영 중이다. 이렇게 함께 논의해서 액션 아이템을 실행해보는 게 좋은 경험으로 느껴져서 앞으로 문제라고 느껴지는 게 있다면 흐린 눈하지 말고 안건으로 잘 올려봐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레거시 코드들 정리해야지’ 하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시간이 있어야 할 텐데’라는 답변으로 외면할 때가 많았는데 개인 시간이라도 내서 부채 청산 사이트 프로젝트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시간이 도저히 안 난다는 문제부터 해결해야할 것 같다.

업무 외 개발적으로는 데이터 사이언스를 찍먹해보고 싶어서 부스트코스를 수강하고 있다. 전부터 데이터 기반으로 일하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서 몇번 시도해봤는데 늘 파이썬 기초까지밖에 못 갔다. 그래도 이번엔 연휴 찬스로 3주차 강의까지 들었다. 처음엔 pivot_table, groupby가 대체 뭘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대충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는 이해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ai를 그렇게 잘 사용하는 편이 아닌데, 데이터 사이언스 강의 들을 때 진짜 요긴하게 사용했다. ai 없었으면 pandas 못 배웠을 것 같다. 스크래핑도 뚝딱하고, 데이터 정제, 시각화도 뚝딱하고, SQL도 뚝딱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그래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지 않을까.

일만 하면 우울의 수렁에 빠질 때가 있어서 의도적으로 취미 활동을 이것저것 시도했다. 3월에는 보컬 레슨을 받고 공연을 했다. 4월은 회사도 정말 바쁜 달이었고, 주말 출근으로 대체휴무 4일을 벌기도 했다. 그래서 진짜 죽음의 달이었다. 공연 전에는 가뜩이나 정신 없는데 매주 노래 연습을 해오라고 하니 내가 왜 한다 했을까 머리를 쥐어 뜯었는데, 막상 할 때는 재밌었다. 그 후에 락밴드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 있으면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 한동안 지리산 백패킹 가고, 서핑 가고 하면서 주말마다 외박을 했다. 그덕분인지 이번 연휴에 예정된 일본 여행을 직전에 취소했는데도 아쉽지 않았다. 오늘까지해서 4박 5일 휴가 동안 그냥 근처 카페에서 미뤄둔 작업하면서 보냈는데 나에게 이런 시간이 진짜 필요했다는 걸 느꼈다. 한편으로는 이때 예정대로 여행을 갔으면 벌여 둔 일들을 어떻게 뒷감당하려고 했을까 싶기도 하다. 이번에 4일은 온전히 작업하는 날로 보냈는데도 내가 목표했던 일을 다 못 끝냈다. 나의 일정 산정하는 감각이 정말 터무니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미뤄둔 일을 끝냈을 때 밖에서 놀다 온 것만큼 만족감이 크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서 약속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있으려고 휴가를 쓴다는 게 나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는데, 주기적으로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겠다.

상반기 회고를 작성하다보니 뭔가 느끼는 게 있다. 이것저것 너무 많이 병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지가 달라졌는데도 이전의 여정에서 짊어지고 있던 짐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갖고 가는 느낌이다. 하반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골몰하고, 그 일을 위해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잘 가름하고, 진짜 나를 위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